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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a/Politics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

WIN-D... 2008. 6. 30. 11:28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박정희)


- 혈서 (최우수 제국군인)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나이 23세.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그 덕에 영광의 얼굴로 [만주일보]에 실린다. 뿐만 아니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졸업식 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힘차게 낭독했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이다


이 글귀를 풀이하자면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쓴 것이다.

이 충성혈서는 한 가지 기록을 갖게 된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혈서로 일본천황에 충성을 맹세한 조선사람은 단 한명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뿐이었다.

스스로 자진해서건 강제로건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천황주의자의 신봉자가 되어 '조센징 토벌'에 몸과 마음을 바쳐 젊음을 불태우게 된다.


당시 친일신문〈만주일보 1942. 3. 24〉기사 일부를 인용하면...

[… 빛나는 우등생 오카이(日系), 고야마(日系), 다카키(鮮系-박정희) 등 5명에게

각각 은사상증의 전달이 잇고 폐식 하였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다.

아니 대일본제국의 군인이 되었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자.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10.26으로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을 때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한 일본 외교관은 이러한 말을 했다.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JS(Japanese Standard)표

[일제인]이라는 말인 것이다.


항일세력의(독립군) 토벌 - 110여회 참가


소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본토의 마쓰야마 제 14연대에 처음 배속을

받았으나 진정한 일본군인을 참작하여 만주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모란강 부근의 영안으로 전출되었다가 화북지방의 열하 보병 제8군단에 배속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열성적으로 항일부대를 토벌했던 공로로 승진이 빨랐던 것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조센징 토벌'이라면 환장을 한 놈이었다.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즐긴 놈이다.


문명자씨의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워싱텅에서 벌어진 일들』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이야기가 나온다.

1972년 문명자 기자가 어렵게 찾아가서 듣고 기록한 생생한 증언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함께 지냈던 어떤 만주군 장교 출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벽력 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이 아닌가."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요오시'란 말은 우리말 '좋다'와는 어감이 다르다고 한다.

'요오시'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고 고함을 지러대는 행동에는

"조센징을 반드시 내 손으로 때려잡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만방에

선포하는 행위인 것이다.


일본군의 특수부대(철석부대) 활약 - 간도특설대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도 선발되는 영광(?)을 얻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

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변신의 달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만주에서 관동군으로 복무하며 항일세력을 토벌하던 생활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날아가 버린다.


친일파 아니 일본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일본의 지배는 영원 할 것이라고 생각한 박정희에게는 일본의 항복은

대단한 쇼크였을 것이다. 패잔병의 낭패감과 극한의 절망에 빠졌으리라.


황군의 군복을 벗어 던지고 민간복으로 같아 입고 만주군의 부대를 탈영하여

피난민으로 가장하고 피난민 대열에 끼어 들어 북경으로 들어가 광복군에 합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리한 상황에만 빌붙는 기생충 같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이것뿐만 아니다. 후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좌익계열의 장교가 되지만

여순 사건으로 불리해지자 천명이 넘는 동료들을 밀고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고

자기만 살아 남는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자기 혼자 살아 남자고 천명이 넘는 동지들을

저승길로 보내고 살아 남았다.


또한 이후에 다시 우익장교가 된다. 그리고 다시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준다.

기회주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기회주의란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보여 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속성이 이런데 일본 패망 후 곧 바로 광복군으로 위장하여 합류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던 일본의 진짜군인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쥐새끼 마냥 살아 남으려고 광복군 흉내를 낸 것이다.


정말 구토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행동이다.


@일본군인 생활에 대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향수


만주군관학교⇒일본육사⇒관동군으로 이어진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복무기간은 5년 정도이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나이 23세에서 28세까지의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몸과 마음을 환골 탈퇴하여

일본인 일본군인이 되어 정서체계와 사고방식 등 모두 일본놈 그 자체였다.

그 증거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뒤에도 틈만 나면 주일 대사관을 통하여 입수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관람하고 일본 검도를 즐기는 것이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취미 생활이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씨 등과 청와대에서 술을 마시며 일본천황의

교육칙어를 번갈아 외우는 내기나 시합을 하곤 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지독한 향수를 엿 볼 수 있다. .


[중앙일보. 1991. 12. 14]


[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1971. 10. 17 계엄이 선포되었다)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여기서 '나'는 강창성 전보안사령관)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만주군 장교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이런 미친 인간이 18년간 우리의 대통령이었다.

그는 통치 기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인재로 등용하여 나라를 좀먹고

민족정기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망쳐 놓았다.


⑨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 5.16후 우방 각국에 친선사절을 보냈는데 제일 먼저 보낸 곳은?

답 : 일본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방문한 나라는?

답 : 일본


-. 최초로 대외정책을 밝힌 기자회견의 주제는?

답 : 한·일 교섭의 재개.


-.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의 망언

일본 방문중 동경의 한 요정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여 동석했던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다.....] 라고 말하였다.

그것도 유창한 일본어로 말이다.


1963년 12월 17일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걸작의 말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부자 사이 같은 관계로서 아들의 경축일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라고 하였다.


사실 자민당의 보수 세력은 박정희와 군대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제국의

동료 및 상관들이었다.


⑩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대통령으로써의 친일 2


일본군국주의 세력의 정신적 유대는 대일 굴욕회담을 (한일협정) 성사시킨다.

여기서 식민지 지배 피해에 대한 거의 모든 권리와 주장을 포기한다.

박정희는 이때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보상 명목으로(한일경제협력을 위한 지원금)

3억달러 정도를 받는 것으로 끝낸다.


장면 시절의 8억달러나 이승만 때의 80억 달러의 주장에 비하면 너무나 헐값이었다.

일본은 이때 받았던 3억달러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피해 보상은 모두 끝났다고 말한다.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몇 백일을 시위해도 일본은 10원 한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모두 친일파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작품이다.


또한 1973년 서울 지하철 차량부정도입 사건을 저지른다.

일본에서 지하철차량 186량에 대한 매매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일본에서

3,204만엔하는 가격을 6,350만엔이란 두 배 정도나 비싼 가격으로 계약하였다.

이것은 만주군 출신 선배들의 로비와 정치자금의 리베이트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 맺는 말 ]


일제강점기 시절의 조선 청년에겐 4가지의 길이 있었다. 물론 더욱 세분하여

분류 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최상천씨가 제시한 4가지의 길을 소개한다.


첫째 :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투쟁하는 대의(大義)의 길을 가는 것.

둘째 : 개인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죽은 듯이 살아가는 침묵의 길을 가는 것.

셋째 : 조선총독부의 들러리가 되어서 개인과 가족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소아(小我)의 길을 가는 것.

넷째 : 일본군국주의를 숭배하고 그 전위대가 되는 사냥개의 길을 가는 것.


식민지 청년이었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위에서 살펴 본 봐와 같이 네 번째

'사냥개의 길'를 선택했다.

그것도 무서운 집념과 실천력을 가지고 철저하게 일본의 사냥개 노릇을 하였다.

참고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첫 번째의 길을 선택하고

일본에 맞서다가 감옥을 수 차례 드나들었다.


집권시절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 등의 죄악을 묻지 않아도....

일본은 패망했지만 친일파는 망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죽었지만 아직 죽지 않았다.


민족은 일제에서 해방되었지만 민족의 정기는 바로 서지 못했다.

모두 친일 세력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파가 대통령을 하고.... 국무총리를 하고.... 각 부서의 장관을 하고....

국회의원이 되고.... 대자본가가 되고...


역사에서 친일파는 승리자라는 공식을 우리는 언제까지 만들어 주며 보아줄 것인가?

자신들의 죄과를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지 않고 죽어가며 이제 그들의

죄상까지 죽어가고(묻히고)있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한 친일 행위는 반드시 그에 응당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

친일파로써 가장 성공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죽어서까지 영화를 누리고 있다.


▶ 메·타·모·포·시·스 ◀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듣거라.


부친에 관한 위에글이 사실이라면 당장 국민들앞에 사죄하고 의원직에서 물러나거라.


아니면 온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고있는 친일청산이라는 커다란과제를


누더기 친일진상규명법이 아닌.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잡고 후손들에게


떳떳할수있도록 올바르게 수정하는데 당신과 한나라당이 앞장서서. 자신의 수족들을


잘라가는 고통을 겪는다면.


이런아버지의 망령에서 벗어난 새로운 박근혜로 다시 태어날것이라 믿으며..


한나라당대표 박근혜 당신과 한나라당의원 모두가 진정한 반성으로 새로 태어남에


국민들은 용서하는 마음으로 받아줄 것이라 믿는다.....


만약그러지 않는다면 박근혜당신과 한나라당은 국민들에 의해 붕괴될날이

꼭 올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로 시작된 친일. 이명박으로 이어진 현재

대한민국의 주인은 친일인가 국민인가...

 



- 독재정권의 거짓말과 속임수에 세뇌당하면서 자라온 일반시민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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