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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나는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가. 세상 만물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의 사슬을 따라가면 최초의 원인, 하나님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것이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세상도 하나님처럼 원인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므로 하나님 제1원인론은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이 논리는, 세계는 코끼리 등에 얹혀있고 그 코끼리는 거북이 등에 얹혀있다는 힌두교도의 관점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일정한 목적에 맞게 설계했다는 목적론을 살펴보자. 이것은 토끼의 꼬리가 흰 것은 총쏘기에 좋도록 하기 위해서라든가, 코는 안경쓰기에 알맞게 만들어졌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둘째, 나는 예수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선을 행했다는 건 인정하지만, 왜 최선의 인간·최고의 현자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예수는 매우 중대한 도덕적 결함을 갖고 있다. 예수는 자기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분노한다.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런 태도를 찾아볼 수 없는데 그쪽이 훨신 더 성자답다.

예수는 무화과가 열리는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무화과를 저주해 시들어버리게 한다. 나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다른 사람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사람이 사악해진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기독교에 매달려온 사람 대부분이 극악했다. 어떤 시대든 종교가 극렬할수록, 독단적인 믿음이 깊을수록 잔인성도 더 커졌고 사태도 더 악화되었다. 형법의 개선, 전쟁 감소, 유색인종에 대한 처우 개선, 노예제도 완화를 포함해 이 세계에서 단 한 걸음이라도 도덕적 발전이 이루어질 때마다 세계적 조직인 교회세력의 끈질긴 반대에 부딪히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교회로 조직된 기독교는 이 세계의 도덕적 발전에 가장 큰 적이 되어 왔다.

-종교 극렬할수록 잔인성 커져-

이상은 버트런드 러셀이 1927년 3월6일 영국 베터시읍 공회당에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내용이다. 이 강연이 80년 지난 낡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최근 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어 보아도 좋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러셀이나 도킨스가 없다. 이유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국회를 움직여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게 만드는 막강한 학원재벌이며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자르듯 잘라내는 무자비한 대자본이자,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강력한 정당이고, 신을 팔아 거부가 되는 방법을 아는 탁월한 상인이며, 그 부가 혈맥 속에서 자자손손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욕심 많은 봉건적인 세습권력이다. 누가 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도전할 것인가.

물론 기독교 비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비리는 일부의 일탈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을 허용받는 대가로 한국 기독교 전체를 옹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극소수만 문제일 뿐 한국 기독교는 문제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정말 쓸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비판은 그만큼 기독교가 건강하다는 증거로 이용됨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살찌우는 영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 부산 서면 지하상가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숙자를 위한 무료 식당인 민들레 국수집을 운영하는 두타 스님은 이날도 식당운영비 마련을 위해 탁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예수천국’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거리 전도를 하던 남자가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이 스님의 머리를 흔들며 회개하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너그럽게도 극소수 기독교인의 행위라며 넘어갔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의 본질이다. 독선과 배타성, 다른 문화에 대한 무례, 가히 폭력 수준인 선교방식과 호전성은 바로 한국 기독교의 특질이다.

-사회·교회 관계 진지한 고민을-

그러면 기독교는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야 하는 것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교회가 없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믿는 이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지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럴 때 교회는 긴장감을 회복해 성찰하게 될 것이고, 사회와 교회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것이다. 두려움을 잊을 만큼 크지 않고, 세속의 권력을 쥐고 흔들 만큼 오만하지 않으며, 남의 생각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절제를 모르는 한국 기독교는 너무 크고 너무 강하고, 너무 많이 가졌다.

〈이대근/정치·국제에디터〉

사실 뭐... 저도 나일론이라 그렇지 크리스챤이긴 한데 교회의 비정상적인 활동들엔 심히 거부감을 느낄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러셀이나 도킨스가 없다. 이유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국회를 움직여 사학법을 다시 개정하게 만드는 막강한 학원재벌이며 힘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무자르듯 잘라내는 무자비한 대자본이자,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강력한 정당이고, 신을 팔아 거부가 되는 방법을 아는 탁월한 상인이며, 그 부가 혈맥 속에서 자자손손 흘러가게 할 수 있는 욕심 많은 봉건적인 세습권력이다. 누가 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도전할 것인가.

말그대롭니다 아주...

암튼 매우 좋은 글이군요. 한국 기독교계에 계시는 분들은 이같은 비판을 겸하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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